무심할려고 노력하고 있다. 情에 넘치다 보면 작은 것에도 애살을 부리고 또 큰 것을 보지 못하는 얋은 것에
집착하게 된다. "중들이 다 무심합니다 " 하고 금강암에 계시던 老스님이, 내가 성불암 스님이 한 달채 보이지
않고 또 연락도 안된다고 하니, 상좌였던 J스님이 자기에게도 연락없다고 하며 그렇게 말했다. "무심하다고."
다음 주 일본에 가서 돌아가신 고모님을 뵙기로 했다. 1월에 돌아가셨는데, 그 때는 회사의 중요일들이 겹쳐
가지 못하고, 일본의 풍습상 화장을 하고 뼈를 집에 모시고 49제를 지난 후에 묘를 썬다고 한다. 고모부의 초상 때도
가서 보니 화장을 하고 납골을 항아리에 넣에 집에 가져다 모시는 것을 보았다. 나라마다의 상례의 차이가 있다
무심한 세월은 빨리 흘러가 45-46년전 고모부부가 부산 우리 집을 방문했을 때, 그리고 내가 아버님과 함께 고모집을
방문하고 아따미로 아버님과 함께 놀러 가 일본식 온천 여관에 숙박하기도, 또는 아버님과 함께 고모 가족들과 고모의
별장이 있는 동해선 끝의 어느 별장도시에서 며칠 먹은 일.기억은 선명한데, 아버님, 고모부, 고모님은 이제 안 계신다
두 봉투를 한자 필체가 좋은 총무 이사에게 부탁했다. 부의'와 감사' 고모님곁에는 수십년간 고모를 도운 일본인 도우미
아주머니가 계셨다. 근처에 사시는지는 몰라도 아마 내가 알기에도 30년은 된 것같은데, 고모부 장례식장에서 인사를
한 기억이 있다. 고모가 심장이식 수술후에도 이분이 매일 집에와 수발을 하였다. 사촌 형님부부와는 별도로 생활했다.
고모부 장례식장에서 손님들에게 "나와 내 여동생"을 한국의 조카들이라고 다른 분들에게 소개하는 것을 들었다. 그 분도
아마 70이 넘었을 것인데..고모님을 평생을 모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교적 성공하시어 일본의 중견회사의 회장으로
계시던 고모부의 덕으로 중상층 이상의 생활을 하신 고모댁과의 오래된 인연으로 국적을 떠나 인간적인 관계였던 것같다
영리하고 여러부분에서 뛰어났던 고모가 일본인 석유화학의 기술장교와 결혼하던 날, 그곳 한국 교포들이 식장을 들이닥쳐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들었다. 그 때도 사랑은 어쩔 수없었던 것같았다. 고모는 한국인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아주
엄격한 생활을 하였는데, 대학 교수며 하나 자식인 고종사촌에도 엄격히 대해 ,일본인 며느리가 된 시집을 살았다고 들었다
요코상도 아버님이 지방에서 여관을 하는 집안의 외동딸로 케이오 대학에서 고종사촌을 만나 연애끝에 결혼을 하였는데
고모가 어찌나 엄격하게 했는지, 그 아버님이 한 달에 얼마씩 요코상에게 돈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마치 내가 딸이 애 둘
키운다고 고생하는 것같아 한번씩 돈을 보내 주는 것과 같은 마음이리라. 요코상은 아들만 3명 , 이제 모두 다 장가를 갔다.
2년전 겨울에 고모님을 뵈러 갔을 때 후지사와의 3층 집에 2,3층은 고종 형님 내외가 살고, 1층과 지하는 고모님이 사시는데
문을 따로 하여 생활을 독립적으로 하며 필요시에 내려와 만나고 하는 것을 볼 수있었다. 요코형수도 이제 나이가 들어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고 있었고 자선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무심속에 누구나 자신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제 무심이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