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쪽 밭 기슭에 콩잎이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 천주교 하늘 공원에서 내려오는 11월의 어느 날, 마음은 허허해 눈에 보이는 그 빛깔이
지금 생각하니 아름다웠던 것. 벌써 8년이 되었나?. 3년이 지나고 나서는 햇 수를 세지 않아.. 키가 큰 사위가 운전을 하고 따듯했던
아버님의 유골함을 들고 있던 느낌은 아직도 있다. 며칠 후 동생들이 온다고 연락이 왔다.간혹 양산을 들리면서도 시간에 쫓긴다는 이유로
잘 들리지 않았다. 할머님과 아버님 그리고 친척들이 있는 그 곳. 언젠가 우리 부부도 들어갈 그 자리. 다음주에 들러 인사를 드려야지.
◉ 기억 ◉
지난 6일이 마치 6개월 된 것처럼 길게 생각되어 진다. 너무 시간이 지나 기억이 무디어 지기 전에 몇 자 간단히 적기로 마음먹다.
(2008,11)
11월 1일
산우이며 절친한 친구인 김 사장의 아들 결혼식이 1시에 그랜드 호텔에서 있어 집 사람과 10시경 갈 준비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김 사장의 부인과 집사람도 고교동기라 모임을 같이 하고 있어 부부 모두 각별한 사이다. 혹 서울의 아버님 상황이 어찌될지 몰라
회사엔 양해를 구해 출근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 사장이 일년 반 전 뇌출혈로 넘어져 지금 재활치료를 받는 상황이라 더욱 결혼식엔 가야 했다.
10시 반쯤일까? 큰 여동생으로 부터 상태가 좋지 않으니 주말이니 서울로 올라 오는 것이 어떠냐고 전화가 왔다. 알었다고
하며 오후에 올라가 밤을 세울 생각을 했다. 다시 또 계모로 부터 전화가 왔다. 아버님이 눈을 껌벅이신다고 한다. 오늘 올라오는
것이 좋겠단다. 그렇다면 , 집 사람에게 결혼식에 혼자 가라고 하고 11시경 집을 나섰다.
공항에 갈까 하다가, 새로 이사한 본가가 용인이라 여동생에게 의논하니, 분당으로 오면 동생이 나오겠다고 하여, 시외버스
테미날에 가니 12시 반 차가 있어 올랐다. 4시간 반 걸린다고 하니 5시 도착이다. 차 안에서 몇몇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며
마음의 당황함과 허전한 맘을 달랬다. 도착하니 여동생 부부가 나와 함께 기흥군 동백마을의 아파트 단지에 도착. Apt는 산으로 둘러
쌓여 쾌적한 느낌 이였다. 몇 개월 전 이사 후 아버님이 공기도 좋고 만족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후에 병원으로 옮기신 것이다.
미국 출장 가기 이틀 전인 10월 19일 분당의 차 병원에 두 번 째 병문안 가니, 그때까지도 정신이 있던 아버님께서 부산에 가고 싶으니
옮겨달라고 처음 말씀하셨다. 25일 미국 출장 갔다 와서 부산으로 모시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그때의 간곡하게 말씀하시던 모습이 너무
아픔으로 남는다. 아들에게 매달리다시피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고, 생전의 보통 모습과 다름을 느끼고 얼마 사시지 못하는 상황임을
직감하였다. 병원에 방이 없으면 호텔이라도 가시겠다고 말씀하셨다.. 미국 가서 일주일 있는 동안에도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
그 전 주에 갔을 때는 분명한 정신으로 " 내가 한 5년 이상은 살 줄 알고 집을 팔아 작은 곳으로 옮기고 돈을 은행에 넣어 넣고 마지막 투병준비를
한다고 너한테도 매정했는데, 몇 개월도 못 가고 이렇게 되었으니 정말 미안하다" 하셨던 것이다. 일산의 주택을 팔아 부산으로 내려 오시겠다고
하길래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계모와 의논하시고 이모가 살고 있는 용인으로 옮기신 것이다. 전에도 부산 기장의 조용한 바닷가로
오시고 싶어 여기 저기 집까지 내가 보고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실현하시지 못하고 서울의 가족들의 권유로 그냥 일산에 주저 앉고 말았다.
당시에만 옮겼어도 여러 가지 건강이나 , 심지어 부동산의 가치도 일산보다 훨씬 나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고교 졸업 후는 아버님과 가깝게 지내지 못하고, 더욱이 결혼을 한 후에는 집사람과 계모와의 갈등으로 마치 남같이 지내고 아버님과 한번씩
별도 만나는 것으로 서로가 만족해야 했다. 아버님의 사정도 그래했던 것이다.
나의 지난 세월에 아버님과 함께 산 것은 길어야 4-5년 밖에 되지 않는다. 태어나서부터 나는 할머님과 따로 둘이서 살았던 것이다.
아버님의 말씀처럼 '喪妻가 亡處'되어 집안이 마음같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계모는 계모대로 이유가 있지만, 이복동생인 여동생의
말처럼 "엄마는 오빠를 자식으로 치지 않으며, 집안의 어른으로 욕심이 너무 많다"는 표현과 할머님이 항상 하시던 말씀" 욕심이 많다"는 것이
나에게도 인식되어 서로 불신하며 살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님과 친자식들에게는 훌륭한 어머님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아버님은 거실에 침대를 깔아 그 위에 누어계셨는데 산소 호흡기를 꼿고 숨을 허허하시며 들여 마셨다 밷었다 하며 입을 움직이고 있는
안타까운 상태였다. 창문 뒤 거실에는 아버님이 꽃을 좋아 하시어 여러 가지의 화분을 계모가 잘 정돈해 놓고 있어 보기에 좋았다. 당신의 몸에는
이런 저런 호스를 꼽고 있어 몸 주위에 온통 반창고를 붙이고 계셨던 것이다. 저가 왔다고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하니 알아들었는지 눈을 감았다
떳다 하신다. 눈에 초점은 보이지 않으나, 말씀은 아득히 인식하는 것 같았다. 몸을 움직이지 못하지만 알아듣는 것이 틀림없다. 누군가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문자로 "말씀은 알어 들어시니 좋은 기억이 되도록 아름다운 말로 "아버님 사랑합니다"하고 말하라"고 보냈던 것이다.
지나고 보니 정말 좋은 충고였다.
11월 2일
근처의 이모부와 이모가 와서 여동생부부, 계모와 함께 덕담을 나누다 모두 돌아가고 12시 넘어 침대에 올랐다. 요즈음 출장 후 연속으로 자리가 많아 시차도
극복 못한 상태로 움직여 육신이 피곤한 상태였다. 몸을 뒤척이다 잠결에 눈을 떠니 5시였다. 계모가 아버님의 머리 위 소파에 잠을 자고 계셨다.
아버님이 산소호흡기에 의존하여 숨을 가쁘게 쉬고 있어, 입 주위가 말라 있다. 컵의 물을 가재에 묻혀 좀 발라드리고 컵을 놓으니 그 소리에 계모가
일어나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6시에 동생부부가 오기로 되어있어 샤워를 빨리 하고 다시 아버님 곁에서 계모와 이야기를 하다, 계모가 잠깐 저쪽으로
간 사이에 아버님 손을 잡고, "아버님 훌륭히 사셨습니다. 자식들도 다 잘 살고 있으니 마음 편히 가십시요 "하며 이야기를 하고 다시 모습을 자세히
얼굴을 보고 있는데 호흡의 간격이 늦어지고 있더니, 순간 숨을 들이쉬고 다시 내뿜지 않는 것이다. 시간은 5시 20분 경이였다.
몇 초 더 기다려 보아도 입을 닫고 움직이지 않는다. 아 임종하신 것이구나 하고 생각이 되었다. 계모에게 급히, 아버님이 임종하신 것 같다고 말씀 드리니
다가 오셔서 어깨를 움직이고 해도 전혀 다른 미동이 없었다. 계모와 서로 임종을 인식하고 119에 전화를 하니, 젊은 여자분과 남자분 두 분이 옮길 캐리어를
가지고 왔다. 이때까지는 행동은 차분하였지만 마음은 당황하였다. 119 여직원이 가슴에 손을 언지고 확인하더니 임종하신것 같다고 하며, 대기한 엠블런스에
함께 모셔 실었다. 그들이 프로다운 침착한 행동으로 아버님을 옮겨 마음이 놓였다. 차 안에서 확인 맥박을 기계로 체크해보니 모니터엔 큰 줄은 움직이지 않고
작은 선만 불규칙하게 깔아지고 있었다. 돌아가신 것이라고 여직원이 말을 했다.
분당의 차병원으로 가자고하니, 지역 밖이지만 가겠다고 했다 며칠 전까지 있던 곳이니 그 기서 사망진단을 하는 것이 편리한 것이다. 앰불런스에서 아버님
손을 잡고 그제사 눈물이 흘렀다. 손이 자꾸 밑으로 떨어지니 여직원이 자기가 무릎으로 받히겠으니 손을 놓으라고 했다. 그 차분하고 프로적인 행동이
너무 대견하여, 지갑에서 십만원 수표를 꺼내 "감사의 뜻으로 드리니 받으라"해도 절대 받지 않는다고 한다. 두 세번이니 마음이라고 권해도 안받는다.
삶의 질이란 이런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많은 부분이 좋아졌구나 하는 생각을 가졌다. 119 직원들이 정말 다시 보였다.
-부산에서 )
넓은 곳에서 손님을 받자..
서울의 일들을 처리하고 온다고, 또 동생들의 만류도 있어 남동생이 아버님의 시신을 모시고 앰블런스를 타고 부산에 먼저 도착하여 뒤에 오고 있는
나에게 보람상조의 사람들이 빈소를 차릴 방의 규모를 묻고 있다고 전화가 왔길래, 친척들이 많이 없는 집안 사정이지만, 좀 넓게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큰 방으로 계약하라고 하였다. 막상 도착하여 보니 커고 좋았다. 오는 조객들이 복잡하게 앉아있는 것보다 편하게 받자는 것 이였다.
올 손님들이란, 가까운 친구들과 회사계통의 지인들이고, 남동생 여동생 모두가 서울에 오랫동안 살고 있어 그 인원수가 한정되어 있다. 일요일 오후
3시쯤 빈소를 차리고, 요즘의 편한 관례대로 입관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손님을 받았던 것이다. 일요일이라 회사도 한두 사람에게만 연락하였는데
회사의 회장님께서 5시경 오셨다, 마침 그때 오신 모 호텔의 박사장, 후배인 모 경찰서장, 친구인 이사장등과 면이 있어 함께 담소를 나누다 취한 상태로
돌아가시면서 내일 또 임직원들과 함께 오신단다. 집안의 대사 때 마다 신세를 끼치고 있다.
조화들이 들어오고 초상 냄세가 난다. 오랜 동료며 후배인 서이사, 그리고 고교동기인 이 사장, 업계 친구이며 해병후배인 전 사장 등이 급히 와
상가를 지키며 계속 도와 주고 있었다. 서이사와 이사장은 출상 시까지 도우며 천주교 묘지까지 따라와 무사히 마치도록 도와 주었다. 여동생 둘,
과 사위 둘, 남동생 그리고 나. 든든한 자식들을 남기고 아버님은 가신 것이다. 다시 못을 아버님이시지만 임종을 내가 보았다는 것이 마음 뿌듯하였다.
오랜만에 외가댁 사람들도 와 함께 인사를 나누고 옛 이야기들을 하고 하였다. 이제는 허리와 등이 굽은 이모들이 나름대로의 자리를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천주교신자였지만, 항상 자유스러운 분위기의 아버님이 였다. 여동생이 근처의 천주교 성당에 연락하여 염도회장이 오셨다. 처음의 인상과
행동이 상업적인 분위기를 느꼈지만, 출상 시 종부 미사를 사직성당에서 보기로 하고, 소정의 대금을 드렸다. 성당에 연락한 것이 잘한 것인지는 몰라도
발인하는 날까지 문제가 될 줄은 생각을 못했다. 여동생도 마음으로 최선을 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다소 트러블이 발생한 것이다.
11월 3일
오후 2시까지 조용하던 상가가 3시 이후부터 조객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다. 모임에서 그리고 사회친구들 ,작은 여동생이 다니던 교회에서
사람들이 오고, 큰 매제의 학교측에서 손님들이 왔다. 집사람 클럽의 사람들까지 밤엔 넓은 룸이 가득 찼다. 특히 회장님과 임직원들이 오고
술이 돌기 시작하여, 웬걸 80세가 넘었으니 호상이다 하며 폭탄주가 수 차례 돌고 심지어 술들이 되어, 위하여- 까지 하는 건배가 돌았다.
밀양의 오랜 정이 깔린 무상의 동생 , 덕상이가 집사람과 함께 와, 옛날 이야기를 꽃 피웠다. 나의 친구인 무상은 이미 저 세상으로 가고
우리친구들을 항상 반갑게 맞이하며 마다 않고 밥상을 차리시던 상의의 어머니까지도 이젠 먼 나라에 계신다. 대학동기인 정상이가 불편한
몸을 끌고 와 , 보낼 때도 마음 아팠다. 암 수술을 한 것이다. 와야 될 사람-몇이 보이지 않고,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의 후의가 덤뿍오기도
했다. 특히 업계 골프모임의 회장인 박 회장의 마음 씀이 고마웠다.
오후 10시에 시작한 입관식에서 눈물이 많이 났다. 보람상조의 젊은 사람들이 시신을 화려하게 잘 처리했다. 아주 흡족하게 해주어 고마움을
느껴 작은 성의로 보답을 하였다. 아버님을 꽁꽁 묶어 가는데 한 부분마다 예쁜 매듭을 위로 남겨놓아 꽃 장식 비슷한 모습으로 보였다. 당신의
얼굴을 쓸어 만지며 말을 해 보았지만, 듣고만 계시는지 대답이 없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길..
11월 4일
밤이 늦도록 손님들이 오고, 술판이 늦게까지 벌어져 자정이 넘어 집사람과 함께 집으로 왔다. 동생들과 친척들이 교대로 남아 빈소를 지키기로
하였다. 출상이 아침 7시. 천주교 사직 성당에 들러 미사를 보고 10시 영락공원에서 화장을 하여 양산의 천주교 묘지 납골당에 모시는 것이다.
집에와 이것저것 정리하고 나니 3시 경이였다. 잠깐 눈을 부치고 습관대로 5시 쯤 일어나 내 사위에게 전화를 하니 진주에서 출발하여 지금 우리 집으로
오고 있다고 하길래 해운대까지 오지 말고 장례식장으로 바로 가라고 하였다. 사위가 선두 차로 나가기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집사람을 깨워 황급히 택시를 타고 식장에 가니, 몇 사람이 술에 취해 자고 있었다. 특히 회사의 김 부사장과 가까운 타사의 김상무가 함께 떨어져 잠들어
있었다. 작은 매제는 아직도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외가 쪽의 젊은 사위가 취해서 이 사람 저 사람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장내를 수습하고
관을 들 사람들과 안치실로 가 , 관을 내고 있는데, 천주교 측에서 그때 본 성당의 위치가 높아 영구버스는 길가에 대놓고 봉고차로 관을 성당으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단되었다.
성당입구에 차를 대고, 봉고차를 기다리니 봉고차는 오지 않고 타이탄 짐 차가 오더니 옆의 가드를 내리고 관을 옮기려고 한다. 순간 마음에 있던
것이 폭발하였다. 잠깐 하고 두 손을 들어 제지하고, 이렇게는 안된다고 이야기하였다. 적어도 관을 짐 차에 옮겨 싣고 언덕에 올라갔다 왔다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동생들을 불러 의견을 제시하니 큰 여동생의 의견이 달랐지만. 간단히 결정하였다. 신부님과 신자들에 다음에 사과를 드리고,
여기까지 왔으니 마음의 정은 다한 것이니 미사를 보지 않고 간다고 내린 손님들을 태우고 영락공원으로 향했던 것이다.
차가 출발하자 맨 뒷좌석에서 큰 여동생과 남편인 김 서방이 다투고 있었다. 여동생의 말인즉 신부님과 사람들이 기다리는데 약속을 어기고
가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오빠가 나쁘다는 것을 토로하고 있었다. 뒷 좌석으로 가 여동생에게 오빠의 마음을 이해하고 넘어가자고 해도 성질을
내고 오빠가 때리면 맞겠지만, 오빠도 아버지와 같은 성격이므로 싫단다. 그날은 참기로 하였다. 좋은 이야기를 해도 성질을 참지 못하는 동생을
그냥 모른 채 하고 영락공원까지 왔다.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동생이 자기 성질을 못 견더 위 경련이 나고 토하고 해, 침례병원으로 택시를 불러
작은 여동생과 함께 보냈던 것이다. 남편인 큰 매제 왈 "형님 걱정 마세요.. 우리 집엔 일년에 두 세번씩 치르는 일인데요" 한다. 참 착하고 순한 남편이며 사위다.
영락공원에서 화장하는데 한 시간 반이 소요된다고 한다. 기다리고 있는 동안 친구들과 식구들 -모두 멍하다 별말을 할 것이 없었다. 11시 반 쯤되어
뼈가 나와 함에 담아 내가 선두 차 뒷 좌석에 함을 안고 탔다. 양산까지 오는 길에 따뜻한 그 함의 체온이 느끼면서 당신의 체온은 오늘이 마지막 이겠네
하며 함을 안고 울었던 것이다. -계속-
- 문자들. 많은 조화처럼 문자도 많이 들어왔는데 그 중 인상에 남는 몇 개를 남겨두고 싶다.
아픈 가슴 추스리는데는 세월밖에... 11/7 밀양에서 상
기대고 싶을 땐 어깨를 내밀어 줄께요-친구 .. 11/7 H
고생 많으셨죠? 마음이 쓸쓸하겠어요 가을이라 더... 11/5 나르시스
아버지처럼 생각할께, 고마워요 오빠-편안한 시간에 술에 취해서 가시 제거 수술해요 좀 덜 아프게.. 11/5 여동생
피곤할텐데..미안해요 오빠, 가시가 많아 서로 찔러가며 무뎌져 가는게 가족이라는 생각 되요.. 11/5 여동생
친구야 사랑한다 . 11/4 S
힘드시죠? 강한 분이시라 잘 하시리라 믿어요. 기운 차리시고 따뜻한 국 드세요. 11/3 J
마지막 모습 보시고 가셔서 좋은 곳으로 가실거에요. 당신 마음 편해서 좋아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11/2 J
참 잘하셨어요. 고맙다고 속으로 자식에게 말하셨을 겁니다. 서로의 마음 응어리를 잘 푸셨습니다. 11/2 Y
정신을 다 놓아도 말은 알아 듣는 답니다. 그분께 마지막 아름다운 선물이 될거고 편히 가실거에요. 11/1 Y
나눌수 없는 슬픔 ..그래서 슬프네요. 며칠전 네이브에 쪽지 보냈는데,,아버님 손 꼭잡고 사랑한다는 말 많이 해드려요 11/1 Y
(naver의 Blog를 사용안한지 일년이 다되어 가는데, Y님은 나와 아는 분의 연락을 받아 서울가는 길에 문자를 보내신 것이다.Y님의
충고는 임종시의 아버님을 위하여 나에게 정말 도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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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1 ◉
11월 4일 -계속
선두 차는 내 사위가 몰고 있었다. 키가 커고 얼굴이 흔출하여 탈랜트같은 사위지만 과묵하여 믿음이 간다. 벤즈의 뒷 자석에서
아버님의 유골함을 안고 아직도 따뜻하게 전해오는 당신의 열기가 나를 곤혹스럽게 눈물 짜게 하였다. 차가 양산 석계의 천주교
묘지 입구에 들어서자, 넓은 묘지엔 이미 가을이 화려하게 들어서 있고, 그 편안한 모습에 마음이 편해졌다.
차를 세우니, 뒤에 따라오던 버스가 클락션을 울리며 저 위쪽의 납골당으로 바로 가야한다고 하며 기사가 내려 이야기 한다.
알고 있다고 대답하고 함을 들고 천천히 걸어서 입구에서 얼마 멀지 않는 할머니의 묘로 올라갔다. 대부분 버스에서 기다리고
몇 사람, 나중 사진을 보니 남동생, 친구 이사장, 사위 등 6-7명이 뒤에 붙어있었다. 할머님 앞에 유골함을 놓고 당신의 아들이
왔음을 알리고 큰 절을 하였다.
생전에 두분의 사이가 그렇게 좋지 않았지만, 할머닌 혼자 계실때면 아버지를 생각하시면서 마음 아파하고 계셨던 것이다. 미국 가기
전에 서울의 병원에서 아버님이 " 할머니가 너를 얼마나 생각했는지 모른다"고 하면서 갑짜기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한다. 납골당을
지으면서 천주교 묘지를 많이 고쳐놓아 그 모양이 너무 편안하고 좋았다. 산을 뒤로하고 도로를 잘 보수하였고, 할머니 묘의 옆도
깨끗이 돌로 길을 잘 다듬어 단정한 모습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납골당에 도착하니, 관리 직원이 나와 간단히 돗자리를 깔고 제상을 마련해 주었다. 여동생들도 병원에서 택시로 바로 와 마침 그 시간에 도착하여
함께 기도를 하고 절을 하며, 정숙한 분위기에서 아버님의 유골함을 편히 안치하였다. 내가 창문 쪽에 있는 로얄층(?)을 잘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좋았다. 어머님과 친척들이 놀라워했다. 창문 밑으로 넓게 무덤들이 보이고, 저 멀리는 하늘과 천성산 줄기가 보인다. 모두가 전망이
훌륭하다고 했다. 이때 어머님도 마음이 변하신것 같았다. 처음 부부단을 계약했는데 아버님과 할머니 근처에 안 온다고 하시더니 편안한
이곳이 좋은 것 같았다. (다음날 전화가 와, 하나 마련해 달라고 하였다. 좋지요 부모님께 신식아파트 하나 구해드리는 기분이라..다행히 아버님
옆자리가 비워있었다. 옆 옆에는 이미 다른 분이 들어와 있었다. 관리실에 물으니 그분은 너무 창가 쪽이 싫어 하신 것 같단다)
천주교 납골당은 옆으로 길게 산 위에 있고 한 골마루를 두고 가 나 다 라 마 씩으로 옛날 학교 건물의 교실처럼 옆으로 정열되고. 2층으로 되어있어,
밝고 시원하게 잘 만들어져 있다. 모든 것을 유리로 처리하고, 진공 포장된 유골을 안치하면 꺼내지 못하도록 실리콘으로 2중 3중으로 봉하는 것 이였다.
지은 지 일년도 채 안되어 약 50%가 팔려(예약)나갔지만, 눈 높이의 료얄층은 다 계약되었다고 한다.
그날은 납골당에 유골을 안치하는 사람들이 우리밖에 없어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한 사람씩 절을 하고 한마디씩 고인에게 이야기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어깨를 들먹이며 대부분 울면서 아버님께 그 동안의 정리를 남기고 꽃을 한 송이씩 놓았다.. 천주교 식은 항상 엄숙하며 자유스러움을
느끼게 하여 나는 좋아한다. 그렇게 관료적이 아니면서, 편하고 수준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올랐다. 테니스를 치며 오랫동안 알던 후배 박사장이 이미 그 근처인 내원사 입구의 "천성산 가는 길"의 식당을 사전답사하고
25명을 예약을 해두고 자기는 약속이 있어 먼저 내려간다고 연락이 왔다. 깨끗한 식당이다. 양산 시장등 공무원이 자주 온다는 것을 나는 전부터 알어
천성산 가는 날이면, 산행을 마치고 그곳에서 손두부 해물찌게를 즐겨 먹었던 것이다. 모두들 음식이 깨끗하고 밑 반찬이 옛날식이며 깔끔하다고 칭찬했다.
돌아오는 길은 큰일을 치르고 난 뒤의 뿌듯함과 허탈감이 교차하고 창밖에 비치는 가을의 풍경처럼 마음의 색갈도 다양했다. 장례예식장에 도착하여
옷을 반납하고 여자상복은 버리고 대충정리을 하고 한쪽 빈방에 동생들을 불러 모았다. 어젯밤 늦게 동생들과 계산을 해 두었던 것이다. 장례식 비용을
제하니 약 2천이 남아 동생들보고 반을 가져가 사용하라고 주니, 동생들 왈 무슨 소리냐며, 오빠가 사용하란다. 그렇다면 그 돈을 가족통장으로 만들어
놓을테니 앞으로 가족일에 사용하자고 하고, 헤여졌다. 모두 피곤하여 각자 호텔이나 집으로 가고 삼오날에 다시 모이기로 했다.
나는 일본서 온 고종사촌 형, 집사람 3명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사위가 해운대까지 모셔주고 간다는 것을 피곤하니 바로 집으로 가라고 한 것이다.
아침 4시에 일어나 5시에 진주에서 출발하여 왔으니 피곤하였을 것이다. 고종 형님은 오늘은 우리집에서 자고 내일 아침 비행기로 일본으로 귀국하는
것이며 오늘은 나와 저녁에 식사를 하면서 한잔 하는 것이다. 대학교수를 하다 이제는 은퇴한 한살위의 형이지만 문학하는 사람의 특유의 외유내강형이다.
그날도 송정에 나가 술을 하고 들어와 잠자리에 들기전에 소주한병과 오차 한주전자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였다.
11월 5일
아침 6시경 책상에 앉어 블로그를 오픈하고 잠깐 생각에 잠겼는데 눈물이 흐른다. 그냥 눈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다. 서재 건너 방에서 아직
잠결의 고종 형님의 신음소리 비슷한 소리가 들린다. 조용히 마시지만 술을 많이 하시니 속으로는 몸이 좋지 않을 것이디. 게이오 대학을 나와
불란서 유학을 다녀와 모교의 강사로 있었지만, 한국계라 더 이상 진출을 하지 못하고 외동아들이라 집안에 의존하여 한 평생 사신 것이다.
돌아가신 고모부가 일본 중견기업의 오너며 회장으로 오래 계셨기에 아따미등에 별장도 두 개 있고, 돈이 많은 집안인데도 고모의 엄격한 관리로
수년 전 까지도 마음 고생을 많이 한 것이다.
생각하니 동생들, 특히 어제 문제가 된 큰 여동생에게 잘해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문자를 보냈더니, 마음이 풀렸는지 미안하다는 회신이 왔다.
내가 좋아하는 동생이니, 지도 오빠가 얼마나 마음 깊이하고 있는 것을 알 것이다. 형님을 공항에 내려 주는데 몇 번이나 손을 흔들고 뒤 돌아본다.
마음 쓰린 무엇이 있을 것이다. 항상 한국에 미련이 있어 안동 하회마을에 종종 오셨다. 지난해 여름에도 부부 함께 오셨다.
회사로 가 회장님과 임직원에 인사하고 업무를 보고 있는데 계모로부터 전화가 왔다. 마음이 변해 그곳에 가겠다고 하시네.. 좋은 생각이라고
말씀 드리고 사 놓겠다고 하였다. 하늘공원 관리소에 확인하니 마침 아버님옆은 비워있고, 하나 건네엔 이미 입주(안치)되어 있단다. 바로 은행으로
송금하여 그것을 잡고 연락하니 고맙다고 하시네.. 유산은 한푼 못 받았지만, 부모님께 사후 아파트를 사드리고 나니 마음이 편하네.
내일 삼오에 산소에 갈 생각을 하며, 회사에서 5시경 나왔다. 누군가 만나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었지만, 몸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냥 집에 들어와
코트를 보니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상주가 그래선 안되겠지만, 잠깐 나가 두 게임을 하고 왔다. 사람들이 상주가 왜 벌써-하고 묻는다. 요즈음은
상주도 살어야지 하고 웃었다. 토요일 회원들 식사대접하기로 하고, 8시경 들어와 집 사람과 모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으론 허전한
한구석을 그대로 남겨놓고 평상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살아야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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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사합니다 ◉
저의 아버님 초상에 직접 찾아오셔 격려하고 위로의 마음을 전한 모든 분들과 멀리서도 마음을 전한 따듯한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아직은 그리움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고, 멍히 눈물만 남겨주신 당신을 생각하며 그냥 돌아왔습니다.. 바람을 안고, 바람의 묘지을 뒤에하고
언젠가 바람되어 찾아갈 날을 기약하며 하늘을 보았습니다. 인생은 역시 바람같이 스쳐가는 것이지만 그 찰나에도 그리움은 영원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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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길에서 ◉
지는 해의 모습은
떠나면서도 저리
가볍고 황홀하게 아름다운데
죽어가는 인간의 모습은
어찌 이리 무겁고 쓸쓸하고
슬퍼만 지는지
나도 언젠가
노을처럼 떠나고 싶다고
꿈을 꾸며 길을 가니
저 하늘이
다 나의 것이네
(이 해인)
-마음은 서울에서 돌아와 , 아무런 생각 없이 무겁다.
의식이 없는 것 같으나, 아마 아득하게 꿈을 꾸며 걸어가시겠지
당신의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시며, 옛날의 모습으로
서 계실까?
-이 해인 수녀의 '작은 기쁨' 책 속에 님의 마음을 적고 있네.
그렇게 현재의 자신을 안으면서 승화해 가는 마음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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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을 보내면서 ◉
한 시간 동안 무언가 썻다
그리고 마음에 들지 않아 지워버렸다.
그렇다, 이렇게 지웠다고 써는 이 글이 맘에 든다.
10월의 마지막 밤에 ,
아버님을 생각하며 11월로 넘어왔다
당신을 보내야 되는 11월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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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효 ◉
하루하루 보내는 것을 불안해 하고 있다.
마치 당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것 같은 생활이다. 어차피
오래 가실 수 없는 상황에 가족들의 생각엔 고통 없이
빨리 세상을 떠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많이 하던 이야길 피부로, 현실로 다가 온 것.
의연하게 갈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느냐, 종교도 마치
그것을 위해 평생 마음을 갈고 딱 는 것이 아닐까?
닥치는 대로 하면 된단다. 그러나 마음이 쓰리는 것은 어찌
할수 없는 인지상정. 옆에서 함께 하지 못하는 현실적인 불효를
생각하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가족의 사정. 현실적인 이해 속에
묻혀져 간다. 어느 날 다시 생각하면 못다한 아쉬움이 분명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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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상 ◉
가을이 깊어가고 있네.. 어제 늦게 도착하여 자정이 넘어 잤지만, 시차의 영향인지 4시반 경 일어나서, 목욕을 갔다 컴을 보다 출근했다.
차를 주차하니 검정 점박이가 거의 도로까지 내려와 반갑다고 하네.. 소고기 포를 하나 뜯어주니 좋아한다. 온 몸을 비틀고 기쁘다고
한다.
서울의 상황이 좋지 않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어제 공항에서, 아침 집에서 통화를 하면서 가족들과 의논하고 있다. 다행히 출장 중에
문제가 생기지 않아 아버님께 감사 드리는 마음이다. 시아틀 공항에서 check-in을 하는데 대한항공 300회 답승이단다. 그러네 ..생각해보니
다른 항공사, 마일리지 적용 안한 외국생활 등을 생각하니 살아오면서 일년이상을 매일 비행기를 탄 것 같네. 이제는 체력이 안되고 무엇보다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글을 써고 있는 와중에 보람상조의 박 담당자의 전화를 받았다. 어찌 되어가고 있는가를 묻고 있다. 생과 사 , 이 모든 것이 일어날 때
마다 가족과 주위가 떠들석 하는 것이다. 생은 무엇인가요, 삶은 무엇인가요? 하는 천년바위 노래가사가 생각나는 아침. 출장후의 첫 출근
이라 바쁘다. 그래도 이렇게 한자 적고 싶은 나는 글에 대해선 내가 반풍수임을 알고 있다. 글을 망치는 것이다. 그러나 좋아하는데 어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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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장 ◉
출장 가기 전날은 뭔가 허전하다.
전에는 꼭 한잔씩 했는데 요즈음은 준비하고 일찍 잔다. 오늘은 바이어와
약속이 되어있어 간단히 하게 될 것 같네.
보통은 직원들이 수고를 하여 샘플을 만들고 준비를 하기에 전날 간단히
함께 저녁과 반주를 한다. 언젠가 외국회사 한국사무소장 할 시에 그날도 서면에서
직원들과 자리를 마치고, 노상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 부산진 경찰서장 차를 박은 것이다.
그것도 뺀 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는 당시의 Royal Duke차로 기억된다. 차 안의
50대 초반의 단정한 분께 "죄송합니다, 다친 데는 없나요?" 하고 물으니 " 젊은 분이
운전을 조심해야지.." 하면서 사라졌다. 그 뒤로 전경들이 가득 둘러싸는 것이
그 신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날 대충 처리하고 이태리인가, 미국인가 나간 기억이 있다. 그 뒤 신문을 통해
그분이 갑짜기 별세했다는 이야기도 알었다. 당시 명복을 빌었다. 멋진 모습의
사람 이였던 기억이다.
이번 출장은 좀 조용한 것이지만, 책임감은 항상 따라 다닌다. 책임감 없는
생활은 인생이 아닐 것이다. 회사에 대한, 가족에 대한, 아니면 자신에 대한
신념과 기본에 대한 책임감이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그기에 사는 Pride도
있는 것이다.
아버님에 대한 책임감을 다할 수 있도록 부디 출장 중엔 어떤 문제가 없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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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화 ◉
아침에 출근길에 전화를 받다. 신호 소리에 깜작 놀랐다, 무슨 일이.. 여동생이다.
매일 아침마다 아버님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하여 통화를 하였는데 ,
오늘은 좀 늦게 일어나 출근 후 전화 하려고 했더니, 집안 내래기 성질 급한 것은
못 속인다. 아버님의 상태가 좋아졌으니 마음 놓고 출장 갔다 오라고 하네.
병들어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는 마음 오죽 하시겠나-하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대부분 겪어야 될 것이지만, 당신도 그렇지만 옆에서 보는 가족들의
마음은 더욱 애탄다. 다행이 좀 호전되었다고 다음주까지 병원에 있다, 더 나으면
집으로 가서 투병생활을 하시겠단다.
약 10년 전 해외 근무 시 병원에서 서울 백병원에서 3개월 시한이라는 통보를 받고
전화로 통화하며 울던 생각이 난다. 부랴부랴 비행기표를 끊고 귀국하여 며칠
보내다 현지로 귀사 했던 것이다. 의술의 발달이 정말 대단하다. 그리고 느끼는
것은 환자도 의사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인생이 그렇듯이..
그 후 본가 근처의 국립암센터에서 수술을 받고, 거의 다 회복되어 울진에 집을
장만하여 요양과 낚시도 하시더니, 다시 또 무리하셨는지 악화되어 투습을 하시게
되더니 결국 오늘의 상황에 오셨다. 건강하시면 요즘 같은 세상에 5-6년 더 90까지는
사실 수 있을텐데.. 한국 전쟁 세대의 파란 만장한 인생살이에서도 잘 지내셨는데 ,
나이가 들고 병이 드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핏덩어리를 낳아서 키워주신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도 멍하니 눈물만 가리더니,
처남이 죽고, 처형이 죽고, 몇몇 친구들이 먼저 갔다. 암이 퍼져 있으니 얼마 후엔
아버님도 가시겠네.. 이별 연습을 마음으로 하는 가을날 아침이 너무 시리게 푸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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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 ◉
노포동 시외버스 터미날에 들러 표를 끊고 회사에 출근하였다. 대동에 들러 간단히 숨쉬기를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였다.
살아 오면서 도움이 되었던 사람들은 모두가 남 이였다. 가족의 품을 떠나면 거친 사회가 바로 직면하니 타인들과의 관계속에
스스로 경쟁을 이기며 살어가야 했다.. 경쟁이란 타인의 상대보다 자신의 마음, 의지와의 경쟁이 더 힘든 것이다.
고향이 없는 것은 마음 슬픈 것이다. 태여 나고 자란 곳은 있지만 , 처절한 마음이 되어 돌아갈때 함께 아픔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것은 고향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것이다. 어차피 인간은 혼자 가는 것이지만, 따듯한 대화를 나누고 서로 품어줄 사람을
알고 기억하는 것은 외로워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동안 부모에 대한 의미가 정리되지 않았던 나의 기억은 이제 내가 부모가
되어 살아 가고 있다. 모든 것을 탓하지 않는다. 세월과 사람과 관계 그리고 배신까지도 탓하지 않는다, 마음에 낀 앙금의 녹을
이제는 녹여버리고 싶다.
주위 사람들의 사랑과 정, 후의 그리고 한번씩 생각나는 의리를 생각한다. 그 정리, 그 의리, 그 관계가 바로 나의 고향 이였다.
고향을 사랑하자. 남에게 기쁨을 ,즐거움을 그리고 보람을 갖고 더 절실히 가슴에 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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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無常 ◉
전에 함께 근무한 김상무 자제분 결혼식이 벡스코에 있어, 화환을 보내고 한 시 반경 도착하였다.
3층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니, 김상무와 함께 근무한 정실장, 박 부사장이 반갑게 맞이한다.
정겹다. 사람 사이의 인정이 필요한 사람들이라 더욱 더 지난 날이 새로 와 부덩켜 안는다. 잊지 않고
한번씩 함께 만나 자리를 하자고 약속하고 헤어져 유토피아 산타클로즈로 갔다.
오후부터 천년 약속 두 병을 마시면서 그곳 형님과 박사장 등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늦게 집에 들어왔다.
아침에 서울서 받은 전화로 마음이 불편하다. 암이란 병은 환자에게 의식을 주되, 고통을 함께 주면서
서서히 죽음으로 모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인식한다.환자의 진을 빼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가족에겐
아쉬움과 환자 수발에서 오는 고단함을 주어 지치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 하루다. 사람과의 관계, 나의 생활 ,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란 없는
우리들의 인생. 無常 -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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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거처 ◉
창 넘어 언덕밑으로 정원과 길이 보이고 사이사이에 옹기종기 무덤들이 있다.
얼마 되지 않은 저 밑엔 할머니가 계시니, 아버님은 마음 가까이 당신의 어머님과
생전에 잘 하시지 않던 왕래를 산보 삼아 하시겠네.
어제 오후 양산 천주고 묘지의 부부 납골당을 보고 계약을 하고 왔다. 마침 창가 쪽에
어느 분이 취소를 하여, 그 자리가 좋다고 하여 소개를 받았다. 눈 높이 정도의 위치의
오른 쪽으로 시원하게 창으로 뚫혀 있어 우선 전망이 첫 눈에 좋은 자리라는 느낌이다.
살아오면서 아버님과 함께 산 적은 불과 몇 년 되지 않지만, 아버님의 은혜는 동안의 섭섭함을
비교할 수 없도록 깊다. 세상에 나오자 말자 할머니와 함께 생활해 왔고, 학교를 졸업한 후는
혼자서 독립하여 살아왔지만, 마지막 가시는 길에 친척들이 많이 있는 그곳, 할머니 묘 근처에
부모님의 작은 거처를 마련해드려 이제는 함께 지내시도록 한 것 같아 홀가분한 마음.
돌아오는 길에 하늘은 푸르렀고, 길가 논의 나락이 황금 빛으로 익어가고 한쪽 편에 심은 콩들도
이제 수확할 때가 되어 누런 잎들에 가을이 풍성하게 춤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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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 ◉
서울서 저녁 7시 비행기로 내려와 송정 바닷가에서 커피 한잔 하고 들어왔다.
어쩌면 오늘 아버님과 생전의 마지막 대화를 나눈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내려왔으나, 간다고 인사하니 서운해하는 모습, 낙담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라 무턱대고 오래 있지 못하는 처지라 돌아왔지만
인생은 역시 홀로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도 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투병생활. 마음이 서리다. 그러나 맑은 정신이 있을 때 대화를
나눌 수 있어 다행 이였다.
자식들에게 좋은 것, 좋은 모습을 남기지 못해 미안하다는 당신의 말씀에
"아버님의 시기에는 전쟁과 어려움의 시대였으니, 훌륭히 잘 하신 것입니다"
라고 말씀 드렸다. 어려운 시기였음에 틀림없었다.. 부디 편안히 덜 고통스럽게
가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드려야지 - 하고 돌아서는 길이 눈물에 가렸다.
인생-그것은 외로운 것.
그 외로움 속에 자유를 느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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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일홍 ◉
10월에는 지다.
회사 출근길 가락쯕에서 오는 길도 한번씩 탄다. 개천을 따라 쭉 뻗어있는 제방 위에는
백일홍 수 십 그루가 피여 있다. 제법 오래된 것으로 키들이 2-3m 되는 것들이다.
이 길이 좁아 자동차 두 대가 마주 만나면 초보자는 당황한다. 이 길을 좋아한다.
개천엔 천둥오리들이 있고, 잡초들이 피여 있다.
아침 4시에 일어나 목욕 가지 않고 컴에서 놀다 보니, 회사업무는 집에서 중요한
메일은 다 처리하고 지시까지 하고 오니, 아침은 느긋하다. 이제 많은 나무들이
꽃을 지우고, 일부에서만 아직 붉은 꽃들이 가을 바람에 흐들어진다. 8월의 만개 때의
화려함과 눈부신 젊음은 아니다 해도 지면서 아름다워하는 꽃들이다.
10월에는 전부 지겠지.
이 길에는 단풍 든 잎들만이 다시 또 명년을 기약하며 바람에 흔들리겠지.
어떤 꽃이나 , 무엇이던지 지고 피는 것이지만,
인간은 한번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그기에 인생의 승부가 있고 매력이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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