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자유

김 대중 컬럼(조선일보)

산같이 산과 같이 2011. 5. 17. 13:35

정권에 대한 보수의 신뢰는 회복 불가능한 수준이고
한나라당은 좌초할 판인데 박근혜 전 대표는 느긋이
개인적 인기에만 안주하고 勢불리기에만 힘쓰나

4·27 재·보선 선거 때 강원도에서 한나라당 엄기영 후보를 위해 뛴 한 핵심인사는 최근 이런 심경을 토로했다. "투표일 직전까지 박근혜 전 대표에게 강원도에 와서 엄 후보 손 한 번만 잡아달라고 간청하다시피 했다. 박 전 대표 측은 거절했다. 내년 대선에서 박 전 대표가 강원도에 와서 표 달라고 하면 찬물을 끼얹겠다." 사정은 분당을(乙)도 비슷했다. 강재섭 후보와 이런저런 사연이 있겠지만 강 후보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박 전 대표 측은 분당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재·보선이 한나라당의 패배로 끝난 바로 다음날 박 전 대표는 29명에 달하는 대규모 기자단을 대동하고 유럽 순방에 올랐다.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박 전 대표는 4·27 재·보선(그 이전 재·보선도 그랬지만) 따위는 관심이 없다는 투다. 공식적인 이유는 "중간선거는 현 당 지도부의 책임 아래 치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형식논리로는 맞는 말이다. 하긴 지금 재·보선의 결과는 내년 전후로 임기가 끝나는 것으로 박 전 대표 측이 굳이 덕을 볼 사유가 아니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가 다음 정부를 이끌겠다고 나선 사람이며 여론조사상 선두주자인 데다 사람들이 그의 지원을 애타게 기대했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지도자 박근혜' '선거의 달인 박근혜'를 보고 싶은 것인데 실상 그는 눈앞의 득실(得失)만 따져 그들을 내친 것이다.

박 전 대표의 이러한 행보와 속셈은 지금 한나라당과 이 정부가 처한 곤궁한 처지로 볼 때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단순히 이해의 수준이 아니라 전통적인 보수우파 진영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무력감 내지 배신감까지 갖게 만든다. 이명박 정부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다. 산지사방에 어려운 국정과제들을 보유하고 있는 데다 한나라당마저 새 지도부와 소장파가 반기를 들고 있다. 역사의식과 보수적 가치를 지키지 못하고 기회주의적으로 방황하고 있는 MB정권에 대한 국민, 특히 보수진영의 신뢰는 이제 회복 불가능으로 가고 있다.

한나라당 내의 싸움은 파벌싸움을 거쳐 당권투쟁의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차기를 겨냥한 대권후보 그룹은 아무도 고개를 내밀지 못하고 있다. 박 전 대표가 워낙 독주하고 있어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김문수 경기지사나 오세훈 서울시장은 전면에 나섰다가 지사나 시장 자리마저 못하게 될까 봐서인지 간간이 저만치 뒷선에서 소리나 내고 있는 형편이다. 한나라당을 지지해온 보수우파 진영은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현직 대통령은 힘을 잃고 있고 다음 주자들은 몸을 사리고 있는데 당은 당권투쟁이고 국회의원들은 각자도생(各自圖生)에 열중하고 있는 판국이어서 지금 여권은 공백상태고 보수정치는 실종했거나 표류 중이다.

그런데 주류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시선을 던지고 있는 박 전 대표마저 마치 오불관언(吾不關焉)의 자세로 느긋이 세(勢)나 불리고 있다. 당은 공백상태로 가고 있는데 박근혜 측의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5개월 새 3배로 몸집을 불렸다. 정부는 몸이 마르고 당은 정신이 혼미한데 박 전 대표의 집마당에는 연일 잔치가 열리고 있는 꼴이다.

나는 솔직히 박 전 대표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가늠할 수가 없다. 많은 정치 굴곡의 현상들을 보면서 나름대로의 '설명'이 가능했던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볼 때 오늘날 박 전 대표의 행보와 처신은 납득하기 어렵고 설명이 실종된 대목이 많다. 그의 대변인격인 이정현 의원은 박 전 대표의 '침묵'을 이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또는 시비에 휘말리기 싫어서, 또는 당 지도부가 해야 할 일이라는 이유 등으로 해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오로지 MB, 한나라당 그리고 자기자신의 위치에서만 사물을 보는 근시안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박근혜씨가 진정 차기 지도자로 부상하려면 그는 MB와 당과 자신의 '안전판'이란 소아(小我)를 넘어 국가와 국민, 보수우파와 주류세력의 관점에서 세상을 봐야 한다. 솔직히 그에게는 지금 MB를 봐주고, 당 지도부를 배려하고, 내년 대선에서의 득실을 따지는 등의 여유가 없다. 그의 모선(母船)인 한나라당이 좌초할 판인데 개인적 인기만 있으면 족하다는 생각에 안주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일 수 있다.

박 전 대표는 유럽순방에서 돌아와서도 여전히 침묵 모드로 일관하고 있다. 하긴 유럽순방 수행기자들에게 단 한 줄의 기삿거리도 내주지 않은 그의 끈질김(?)으로 보아 예상했던 일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알고 싶다. 그가 이 나라를 구할 어떤 역사의식과 비전을 갖고 있는지, 이 국민을 이끌 어떤 철학과 시대정신을 보여줄 수 있는지, 한나라당을 개혁할 어떤 복안을 갖고 있는지 직접 듣고 확인하고 싶다. (2011.5.16)

'무한자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화의 강  (0) 2011.06.09
계절의 아픔  (0) 2011.06.01
  (0) 2011.05.16
고운 詩  (0) 2011.05.11
부처님 오신 날  (0) 2011.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