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편에서 계속>1928년 11월 파리를 떠난 김우영-나혜석은 1929년 3월 귀국했지만 둘은 예전같은 관계가 아니었죠. 김우영은 외무성을 그만두고 서울의 여관에 머물며 일을 찾고있었습니다. 나혜석은 모처럼 시가(媤家)인 부산 동래로 내려갔습니다. 나혜석에게 이 시기는 고통스러웠습니다. “남편이 기생과 사귄다” “이혼을 모색한다더라”는 소문이 들리는가하면 시어머니는 세계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도 안사온 며느리를 구박한겁니다. 나혜석이 사태를 악화시킨 부분도 있습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불륜상대 최린을) 나도 퍽 흠모했다”고 말한 겁니다. 게다가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최린에게 도움을 청하며 다시 묘한 관계가 되자 김우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사람은 결국 1930년 11월 이혼합니다. 나혜석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습니다. 김우영은 이혼 넉달후 재혼하고 최린은 앞서 쓴 것처럼 나혜석과 결별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후 나혜석에게는 세상의 냉소(冷笑)가 쏟아집니다. 1934년 쓴 ‘이혼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이 화제는 됐지만 그것이 홀로선 여인의 재정자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혼고백서’라는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에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 나혜석 거리에 있는 조형물.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나혜석도 인습과 성차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1935년을 전후로 나혜석은 몰락합니다. 작품전 실패-맏아들의 죽음-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쳤습니다. 이후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에 머문 것은 32세의 나이로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습니다. 나혜석의 삶은 파란만장해 그것을 짧게 정리하기는 힘듭니다. 다만 말년의 그녀는 아이들을 그리워해 자주 찾아가지만 전 남편 김우영과 시어머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했습니다.
“중 2학년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조카 나영균 전 이대 교수도 나혜석을 처음 본 순간을 “하교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하지요. 이렇게 방황하던 나혜석은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숨진 행려병자로 발견됩니다. 화가이자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나혜석의 그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립니다. 한국 인상주의의 개척자라는 평이 있는가하면 ‘작품의 수준이 명성에 못미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이에 대해선 아마추어인 제가 논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그와 관련했던 남자-남편 김우영, 불륜남 최린, 이루지못한 사랑 이광수-들은 전부 친일파의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 나혜석 거리의 초입에 세워진 구조물 밑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김우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고 최린과 이광수도 업적이 친일파라는 굴레에 짓눌려버렸지요. 반면 나혜석만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징용 독려를 위한 담화와 강연에 참여해달라는 일제의 요구에 “내가 참여해야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사람의 삶이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나혜석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것은 20일 아침 걸려온 전화 한통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사에 밝은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김건 전 한은 총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혜석과 김 전 총재의 인연을 상세히 설명해준 것입니다.
고 사장에 따르면 언론인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김 전 총재 재임시절 그를 찾아 “나혜석 기념관을 만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지만 김 전 총재는 단박에 거절했답니다. 그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 한 중년 여성이 이 선생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봉투를 내놓고 “나혜석 선생 기념에 써달라”고 했지요. 그녀가 김 전 총재의 부인이었다는군요. 자신이 부인한 어머니를 놓고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을 김 전 총재의 후회가 연상됩니다. 지금 그 아들과 예술계의 도움으로 나혜석의 고향 경기도 수원 효원공원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사이에 조성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혜석 거리’입니다.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거기 살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