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같이 산과 같이 2018. 1. 22. 10:40

꿈 )


택시를 탓는데, 차 안에 S가 있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에 무엇을 사야 된다고 하길래, 여자 택시 기사에게 내가 상점에 둘렀다 가자고 하였다.


대학생 시절, 서울서 방학으로 내려 와 다음날 아침 안적암 가기 위해 밤에 부산서 서창가는 택시를 탔는데, 여러 사람이 합승한 택시안에서 내게

머리를 기대어 가던 것처럼 꿈에서 그렇게 기대어 있었다. 중간에 상점에 들러 무엇을 샀는데 S 집까지 가지 않고 꿈을 깼다. 꿈이란 때때로 현실을

나타내기도 한다. 1월 20일 제주도로 가족과 함께 옮긴다고 했다. 마지막 통화를 하던 중에 작년초에 그랬드시, 정치적인 이야기로 대화를 망치고

말았다. 다시 전화하지 말라고 화를 냈고, S도 성을 내고 전화를 끊었다. 서로 가혹하게 마무리 하게되어 현재의 상황이 과거에 상처를 주고 말았다.


지난 주 다음과 같은 문자를 주고 내 맘을 정리하였다. 투병을 하고 있으니, 마음에 상처를 줄까 부담되어 나의 생각을 분명히 전해 주었다.

"연락할 시간이 이번주 뿐이네. 마지막이 나쁘니 모든 것이 물거품. 변하는 인생사와 사람들이니 지나간 것은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부터 인연이

안될 사람을 오래 가슴에 둔 것이 사는데 아픔만 주었네, 그래도 그 만큼 성숙할 수 있어 후회않고 감사한다. 세월가면 하얗게 마름되는 것, 급할 것도

없으니 가끔 기억나겠지. 건강하고 또 건강하고 가족들과 즐겁게 지내길 진심으로 빈다."  


S와 나의 인연은 서로의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로미엣과 줄리엣 같이 극한 비극은 아니였지만, 인생길을 왜곡시키고 그 여파가 오래동안

서로의 가슴에 멍이 되었고 그 상처를 지우며 살아왔지만 때때로 그 아픔에 방황하기도 했다. S는 좋은 가문에 미인이였지만, 작은 도시에서

나와의 관계가 문제되어 곤혹한 시절을 보내다, 자신의 꿈을 펴지 못하고 늦게 결혼하였다. 50대 초반때 S의 사촌인 내 친구인 C의 모친 장례식

에서 대학이후 처음 S를 만났다. 비오는 온천장에서 S가 한 말에 너무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너가 결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결혼했다."


"설마 그토록 나를 좋아하던 너가 다른 여자와 결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밀양에 다시 찾아 올 것이라고 믿었다"고 울고 있었다.

집안에서 반대하고 대학생이라고 해도 초췌하게 서울 생활하던 내게 희망을 버렸는지 ,어느날 밀양에 찾아간 나를 모친 앞에서 소개시키며

지가 18살부터 교제했는데, 이제 헤여진다고 선언하며 인사시켰다. 그 날 모친이 내게 집안 내력 등을 물어 보기도 했다 . S는 집안의 반대가 

심해 , 외출하지 말라고 머리를 깍였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당시 우리 집은 서민의 모습에 나도 어리고 뛰어난 학생도 아니였으니 그럴만 했다.


우리는 어린 고교 시절에 이미 선을 넘어 사랑했. 외롭던 내가 S에 빠졌고 S는 수동적이였지만 과감하게 나를 따라 주었던 것. S의 절교 선언

이후 나는 서울로 와 그 해 학기를 마치고 바로 해병으로 입대했다. 극한 상황에서 새로운 청년으로 태어나고 싶었지만 맘에 남은 S의 像(상)은

오랫동안 마음에 부각되어 왔다. 그러나 현실에 살아 남기 위해 과거는 덮고, 새로운 길을 치열하게 걸어 왔다.가끔씩 고교 친구들로 부터 S가

부잣집에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다고 들었다. "못 살아 고생하는 꼴보다 낫지" 하고 넘어 갔다. 그 후 50대 후반에 서로가 전화를 하게 된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두 사람의 상황이였지만, 가끔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화로 나누기도 하고 안부를 묻기도 했는데,6-7년전 전화가 없어 궁금했는데.

이듬해 암 치료를 받고 투병 중이라는 전화를 받았다. 내 땜에 암이 걸렸다고 농담을 하기도 하였다. 내가 좀 자유롭게 생활하는 것 같아 맘에

걸렸다고 한다. 한번은 그런 문제로 간섭하길래 "가시나, 내 마누라도 아무 말 않는데, 니가 무슨 자격으로 그렇게 하노?" 하고 짜증스럽게 말한

것이 상처를 준 것인지도..S왈 결혼 후에도 남천강가를 걸으면서 뒤에서 내가 부를 것같은 생각에 돌아보며 많이 울었다고 했다. 맘에 둔 것이다.


나의 딸이 시집을 가고 좀 마음이 편안한 어느 가을 날,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는데 받으니 꺼졌다. 이상하여 내가 다시 전화를 해보니 S였던 것.

사촌인 C에게 나의 전번을 물어 연락을 하였던 것인데,  재회라고 하면 너무 큰 그림 같지만 옛날 학생 때 만나던 중앙동 부산호텔 만나 우리는

서로가 어찌 할 수 없는 사이라는 현실을 인식하고 헤여졌다. 그 날 S는 다방에 앉자 말자 눈물을 흘려 내가 손수건을 줄 정도였다. 지나치면 모를

것같은 그런 모습의 50대 중반의 아주머니였지만 곱게 늙어가고 있었다. 참 착하고 여성적인 사람으로 남편과 함께 JC 활동등 잘 살았다고 했다.


작년 초부터 대화가 삐끌어졌다. 세월호 사건, 문재인 이야기등에서 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위선적이고 선동적인 그 팀들을 좋아하지 않아 대화가

부딪치기 시작하고 S도 강한 성격이라 밀리지 않았다. 작년 말 키워주던 외손녀가 제주도 외국인 학교에 입학해 사전 답사하고 와, 가족들이 모두

옮긴다고 했다. 건강도 문제가 있으니 공기가 좋은 곳에서 살아갈려고 한다고 하며, 가기 전 마지막으로 차나 한잔 하자고 했는데,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고 전화로 정치문제로 싸우기만 하고 끝났다.내가 너무 옹졸했고 강한 순이도 밀리지 않았다. 세월이 변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아쉽다.


나이가 들어 육체가 늙고 , 고집과 자신의 생각이 강해 현재가 모든 것을 우선하게 되니, 아름답던 추억도 잊어져 가고 그 소중함이 사라져 버렸네.

장례식장에서 만날 때, 나도 기억 못하던 옛 우리 부산집의 주소를 외우며 자기가 편지를 수 차례 보냈다고 했다.당시엔 전화가 부족한 시기였으니..

나를 깊게 생각해주던 S가 상처를 많이 받았음에 틀림없지만 나도 모든 것이 서글퍼졌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과 생각에 동의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재며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