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5

사는 것.

산같이 산과 같이 2015. 1. 17. 17:46

홍콩법인 한국 사무소를 맡아 있던 시절, 주요 업무는 중국과 자카르타에 있는 그들 공장에 한국서 자재를 매월 선적하고 기술직 인원을

공급및 관리하며 , 한편으로 그 법인과 계약한 리복 한국 개발센터를 운영하고 있었다. 미국인 포함 약 50-60명이 근무하던 개발센터는

자금은 우리가 지원하고 대신 중국과 인니 공장에 리복의 신발 오더를 받아서 생산하며 그 개발비용을 가격에 정산하는 식이였다.

 

당시 내 밑의 임원으로 관리직으로는 이사가 두명, 기술직으로 지금 경주에서 전원주택을 지워 즐겁게 살고 있는 L이사와 그리고

같은 직급의 K이사가 있었다. 두분은 가가운 친구사이 였는데, L이사는 기술적으로 추진력이 있고, K이사도 화합적이며 추진력이

있었다. 그 뒤 우리 법인과 리복이 떨어지면서 헤여졌다.L이사는 그 뒤 지금 우리회사에서 상무로 잠깐 있다 건강땜에 사직하였다.

 

폐쪽에 이상이 있어, 쉬면서 인테리어 학원을 1년 다니며, 경주의 넓은 땅에 집을 짓고 들어간 것이다. 한번 방문한 적도 있는데 멋진

주택에 살고 있다. 자식들도 잘 되어, 딸은 부산의 모 재벌급 상장회사의 외동아들과 결혼해 잘 살고 있는데,부부가 조용히 전원생활에

만족하며 지낸다고 한다. L상무는 남해마을 그리고 독일까지 가서 블록을 사오고 직영으로 집을 지은 대단한 집념을 가진 분이다.

 

어제 세라믹 벽돌건으로 골조 없이 벽체를 쌓는다고 하여 전화로 물어보았는데 방금 그 뒤 어떻게 되었는지 전화가 왔다. 세라믹 벽돌의

우수성을 잘 설명하고 좋다고 한다. 전화가 끝날 즈음 뜻박의 이야기 한다.지난 달 중순에 K이사가 기장 원자력 병원에서 죽었다고 하네.

담낭암이라고 한다. 일년간 투병했다고 하는데 L상무도 죽기 한달전 통화를 했는데 투병중인지 몰랐다고 한다. 나는 전혀 연락이 없었다.

 

리복 개발 센터를 떠난후 K이사는 실력이 있어 계속 브랜드쪽에 근무 한 것으로 듣고 있으며 언젠가 중국에 근무한다고 나한테 한번 들러

대화를 나눈 적이 있은 후 그 후에는 본 적이 없었다. 화승 출신인 L상무와 달리 K이사는 개발센터에서 처음 만나 2년 같이 근무했지만

좋은 기억을 갖고 있었는데 안타깝다. 남의 일이 아닌 우리 모두의 가야 될 길로, 더욱 허무하네. 허물어지지 않고 갈수는 없는가?

 

L 상무가 지은 본체와 펜션으로 사용하는 작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