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자유

당신의 왼편에서

산같이 산과 같이 2012. 12. 28. 08:46

 

 

 

문/학 들.여.다.보.기

 

                                                                               글 _ 박은태 / 문학평론가

 

 

황재연 시집 『당신의 왼편에서』

68개의 북소리

 

 

1.

오늘은 어제와 다르고, 내일은 아마 더욱 많이 달라질 것이다. 인간이 만든 세상은 인간을 밟고 저만큼 앞서 가고 있다. 우리는 거의 모든 능력을 이 속도에 적응하기 위해 사용한다. 그래야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고, 부의 행렬에 동참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 겨우 확보하는 것은 부가 아니라 사회적 생존일 뿐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눈 돌릴 틈이 없다. 광고와 영화와 텔레비전이 점점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이미지, 스펙타클한 영상들로 채워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지간해서는 쳐다보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이런 현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몇몇 족속(?)들이 있다. 그중 한 부류가 시인이다. 보통 사람들에는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주변의 사소한 것들에, 그는 눈길을 보내고 귀를 기울인다. 왜냐하면 그것들-자연, 사물들, 사람들-이 시인에게 몸짓과 말을 건네기 때문이다. 결국 시인은 멈추어 자신을 그들에게 내어준다.

 

마음이 얇아 깨어지기 쉬운 여자였다네 /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 맛없는 여자였다네 / 평생 싸우며 살아도 참게같이 걷는 서방도 가진 / 여자였다네 / 단단하지 못해 잘 패이기도 하는 못난 여자였다네 / 너무 무성해 뜯어내고 싶은 그리움 많은 / 여자였다네 / 소주 한 잔 걸치고 소주 한 병의 울음 우는 / 가량맞은 여자였다네 / 전생, 그 여자 / 있는 듯 없는 듯 없는 듯 있는 듯 /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 같은 그 여자 / 먼먼 이승까지 타박타박 따라 와 / 내 이름 석 자 같이 쓰고 있네 - 「전생의 여자」

전생의 여자에게 삶과 존재의 한 자리를 내어주듯, 시인은 다른 사물과 존재들에게도 자신을 내어준다. 오래된 가방, 깨어진 접시, 버려진 우산, 산길의 돌탑, 어느 외진 법당의 비석, 고장난 전화기, 새끼 발가락, 댓돌 위에 놓인 고무신, 때를 잘못 잡은 가을 개나리, 생명을 다하고 떨어진 낙엽, 잊혀진 사람, 알 수 없는 슬픔, 대상 없는 그리움 등 시인은 사소한 것들(사물, 존재, 감정 등등) 하나에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한마디로 시인은 말하지 못하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버려진 것들이 머무는 하나의 &lsquo만신전&rsquo이 되어준다. 이런 시인이 현대 삶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따라서 시인은 현실적으로 불행한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2.

그렇다면 시인과 달리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는데 성공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생활의 풍족함은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활의 풍족함이 곧바로 삶의 충만함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다. 소유, 필요, 욕망, 경쟁, 성공, 권력 등은 우리를 벽 속에 가둔다. 이것들은 나누면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들이고, 따라서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지켜야 하기에, 높은 담과 견고한 자물쇠가 필요하다. 이렇게 얻은 것들로 우리는 치장하고 과시할 수는 있어도, 우리의 존재와 삶을 채울 수는 없다. 현대인들이 겪는 삶의 무의미, 공허함, 소외는 많은 부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나누면 줄어드는 것들이 아니라,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 것 아니 나눌수록 더욱 풍성해지는 것들로 우리의 존재와 관계를 채울 때만, 우리의 삶은 충만함에 이를 수 있다.

 

이팝나무 가지마다 / 하얀 이밥이 수북하다 / 올갱이국물빛 하늘에 훌훌 말아 먹고 싶다 / 구름 한 너울 찢어 보쌈 해 먹고 싶다 / 누가 배고파 죽어 쌀나무가 되었나 / 배고픈 이 실컷 먹으라고 / 굶지 말고 누구라도 배불리 먹으라고 / 따끈한 봄 햇살에 고슬고슬 뜸 들인 / 이밥 한 그릇씩 가지마다 내어놓았다 / 탁발 나온 들쥐에게도 / 하늘을 오가는 노숙의 저녁새에게도 / 멧밥같이 수북이 한 그릇씩 퍼먹고 가라고 / 든든하게 먹고 가라고 / 쌀 몇 가마니 밤새껏 쏟아 부어 놓은 / 저 맘씨 좋은 이팝나무 - 「이팝나무」

 

이팝나무에 열린 꽃이 &lsquo맛난 쌀밥&rsquo이 되면, 하늘은 &lsquo올갱이국&rsquo이 되고, 구름은 &lsquo백김치&rsquo가 된다. 그러면 &lsquo배고픈 자연의 노숙자들&rsquo은 이 풍성한 자연의 저녁을 먹는다. 이 풍성한 자연의 잔칫상은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다. 아니 많은 존재들이 이 향응에 참석할수록 이 밥상은 더욱 풍성해진다.

이런 존재와 세계의 충만함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가 특별히 치를 현실적 비용은 없다. 발걸음을 조금 늦추고,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닫힌 몸과 마음의 문을 살짝 열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시인처럼 자연과 사물과 인간이 맺는 내밀한 세계에 참여할 기회를 얻고, 올바른 관계, 삶의 가치,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의미를 조금씩 배우게 될 것이다.

현실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시인은 가난할 수밖에 없고 때문에 불행하다. 그러나 완만한 상상의 길을 느리고 가볍게 걸으면서 세계의 잔치에 참여하는 시인의 삶은 풍성하고 충만하다. 그래서 시인은 행복하다.

 

3.

시인이란 &lsquo하나의 몸에 천개의 마음&rsquo(『당신의 왼편에서』-K아오스딩에게)을 가진 존재이다. 그럼 &lsquo하나의 몸에 천개의 마음&rsquo을 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

 

가끔, 몸 안에 든 것 다 들어내어 / 청소 할 수 있었음 좋겠다 / (중략)

어둠 받아먹어 살진 몸, 텅 비워놓았으니 / 북채 들어 나를 때리면 둥 둥 둥 맑은 소리날까

가끔, 몸 안에 든 것 다 비운 북이 되고 싶다 / 어깨바람 솟아나는 북소리가 되고 싶다 - 「북이 되고 싶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욕망이 들어선 자리가 비워지면, 그 자리에는 맑고 투명한 것들이 들어선다. 영혼을 맑게 하는 투명하고 깊은 슬픔, 마음을 열지 않으면 느낄 수 없었던 세계의 작은 활력들, 가슴을 잔잔하게 뒤흔드는 잃어버린 그리움, 고통이란 옷에 가려진 영혼의 길 등이 우리를 채운다. 그런데 현실의 욕망과는 달리 이런 것들로 우리의 내면이 채워지면, 우리는 오히려 겸손해진다. 나 말고도 세계에는 의미와 가치로 가득찬 존재들이 너무 많음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들과 더불어 살고자 한다. 수많은 좋은 이웃들로 둘러싸인 삶이란 얼마나 풍성한가.

물론 모든 사람이 시인과 같은 방식으로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시인될 필요가 있다. 현대사회가 주는 지나친 속도와 긴장감은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의 몸과 영혼에 조금이라도 진정한 휴식을 주기 위해서라도, 시인의 삶을 흉내낼 필요는 있다. 그러나 일상의 속도와 습속에 깊이 물든 우리가 현실에서 시인의 삶을 흉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시인은 시인처럼 사는 것에 머물지 않고, 시를 적어 시집을 내는 모양이다. 틈틈이 비는 일상의 시간이 생기면, 자신이 그린 상상의 지도를 따라 우리가 시적 세계를 추체험이라도 하라고 말이다.

『당신의 왼편에서』에는 황재연 시인의 몸과 영혼을 두드린 68개의 북소리가 있다. 그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우리의 몸과 영혼도 북이 되어 울리는 경험을 하지 않을까. 물론 여행의 시작은 굳이 황재연 시인의 북소리가 아니라도 좋다.

 

<예술부산 2012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