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적암-1

산같이 산과 같이 2008. 4. 30. 03:59




내 마음속에 절이 있다면 그 곳은 대문의 형태만 갖추고 온갖 꽃들이 입구 돌 계단 옆을 장식해 벌과

나비들 처럼 누구라도 마음 편히 드나 들수 있는 조그만 암자, 안적암이다. 뒤로는 정족산의 정기를

받으며 앞으로는 천성공룡의 신비로운 자태를 앞 마당에 머금고 있다. 대웅전을 마당에 두고 옆에는

요사채가 길게 한 채가 있고, 전에는 없던 종각이 대웅전 왼쪽 마당 한쪽에 새로 들어선 것을 제하고는

옛날과 다름없다.

 

돌 계단에 막 올라서면 예나 지금이나 오래된 감나무가 가지를 늘리고 있으며 그 밑에는 작은 평상이

있다. 넓지 않는 절 마당의 대웅전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불교에 무식해서 잘 모른다.

통도사나 내원사와 관련된 말사가 아닌 것같았다. 지금 남자 스님이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한때는 고령의 여 스님이 계셨고, 그 스님의 딸이 보살로 함께 기거한 적도 있다.

 

그 넘어 작은 가사골 , 큰 가사골에 지금은 신들린 사람들이 지은 것같은 작은 초가모양의 암자를

몇 년전에 본 적이 있고 그 후로 가사골 쪽엔 가보질 않았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 시험에

떨어져 공부라도 해볼까 하고 찾은 것이 천성산이다. 한번도 와 본적이 없던 나는 버스를 타고,

양산 중방에 내려 , 사람들에게 물어, 짐꾼을 부탁하여 지게로 간단한 이불과 짐을 지고 내원사 본 절

앞의 산 중턱 토굴로 향했던 것이다. 스님께 두드러면 받아 줄것이라는 젊은 날의 생각만 가지고

왔던 것이다.

 

생각하면 아스팔트도 없던 그때, 무슨 마음으로 그랬는지, 그 먼길을 그 분과 함께 걸어 토굴까지

올라가니 스님은 출타중이라 다시 먼길을 내려와 익성암에 머물었던 것이다. 절 생활이란 그렇듯이

마음공부를 하는 곳이지 입시공부는 잘 되지가 않았다. 당시 익성암에도 노 스님이 계셨는데,

스님의 따님이 두분, 한분은 스님으로, 한 분은 그냥 젊은 보살로 함께 있었던 시기였다.

 

나는 절에 부탁하여 점심을 도시락으로 싸 ,내원사 본절의 산지기와 어울려 이산 저산 함께 다니면서

내원사의 그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고 있었다. 당시는 정말 인적이 더문 상황이라 사람이 그리운 시절

이였다. 금봉암과 성불암이 알려져 있었고, 지금 융성한 노전암도 그땐 작은 암자였다.

어느날 산지기와 함깨 정족산을 내려오다 산소가 충만한 곳이 있어 숨만 쉬면 코가 뚫힌다는곳이

있다기에 가 보았다. 날아가는 백사도 보았다고 했다.

 

지금에사 보니 , 바로 공룡능선으로 올라가다 집북재에서 왼쪽으로 작은 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상리천

이라 요즘 이름부친 그 길이다. 사 오십 분 내려오면 안적암, 가사골 그리고 정족산에서 내려오는 계곡과도

만난다.

그 당시에는 숲이 너무 우거져 길이 잘 없던 시절이고 숯 꿉는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이용했다.

이씨 할아버지를 만난 것도 그 즈음이다. 이 재현 함아버지는 지금 아마 90이 전후 일것인데,

아직도 안적암 입구의 초가에 사신다. 가사골에 있던 초가집을 안적암쪽으로 옮겼던 것이다.

 

서창의 포수가 올라와 , 익성암에서 가사골로 옮겨 살고있는 나에게 재미난 무용담을 많이 들려주었다.

하루는 호랑이를 만났는데, 가만히 있으니 피해가더라고 한다. 산에 있으면 기인들의 이야기가 많다.

공룡언덕의 한 중턱에 한 젊은 여인이 신이 들어 혼자서 산다고 한다. 누구는 성불암뒤에서 산삼을 켜,

주체할 수없는 힘에 한 6개월동안은 다방 마담옆에서 지내야했다고 한다.

 

그 때의 기억중에는 무엇이라고 해도 권성호씨를 잊을 수없다. 경북 출신의 그는 몸이 아파 산으로

들어왔는데 문학도였다 똑똑하신 분이였다. 어느날 산토끼를 잡아 요리를 해 놓았으니 오라고 한다.

작은 가사골에 있던 나는 데리러 온  그와 함께 산 중턱 언덕을 넘어 큰 가사골로 갔다. 별 맛은 없었지만

그 마음 씀씀이가 정이 가 소주만 두어잔 하고 왔다. 혼자서 돌아 오는 밤 길은 머리가 쭈빗쭈빗했다.

당시로 보아서는 첩첩 산중이였다.  권형은, 그 후 이야길 들어니  큰 가사골의 따님과 애기를 낳고

그곳에서 살다 내가 떠난 후 2-3년후 병이 악화되어 돌아가셨단다. 술을 너무 많이 했다고도 한다.

 

가사골과 안적암에 있던 시기는 한달에 한번 정도 부산 집에와 돈을 받아 먹을 것을 사서 갔는데,

지금의 영산대가 있는 산 밑 밭길로 내려오면 주남 마을을 통해 서창으로 다니곤 했다.

어느날은 할아버지와 권형과 함께 서창 장날에 구경하러 가기도 하고 무엇을 사서 걸어 올라왔던

때이다. 비가 오는 날은 구름에 산 중턱에 깔리기도 했다.

 

무엇인가 아쉬움이 있고, 부족하지만 마음편한 그런 생활이 좋았던 것이다. 자연과 함께하며 그 속에서

커지도 작지도 않은 한 낱의 개체로서, 무엇인가를 꿈꾸는 안적암의 동자승이나 마음의 병, 육체의 병을

낫기위해 기거하는 사람들과, 또는 이씨 할아버지처럼 마음을 비우고 당신에게 맞는 생활을 갖기위해

그 곳에서 살고있는 순순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그런 생활은 외롭기도 하다. 부산의 집에 왔다 무슨 큰 보타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바로 그날

다시 울산행 버스를 타고 늦어도 돌아오곤 했다. 집보다 더 마음 붙일수 있는 무엇이 나를 끌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